신화를 만들어낸 텍사스 1편

Over the Six Flag

요즘 미국에서 가장 유망하고 매력적인   도시 텍사스를 아시나요?

한여름 찜통 더위 속에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지랭이 지열을 밟으며, 오늘도 열심히 아스팔트를 고르는 건설노동자들과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 쓰고 농기계를 몰고 있는 농부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화씨 110도, 섭씨로는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도 야외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거의 열대지방에서 살다가 온 이민 세대들이다.

텍사스… 주의 이름은 인디안 아메리카 카도족이 사용하던 단어 타이샤에서 유래되었으며 ‘친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텍사스는 넓다. 

미국에서는 알래스카 다음으로 넓고 본토에서는 가장 크다.

인구는 캘리포니아 다음으로 많다. 

미국, 특히 텍사스가 다민족이 모여 사는 강국, 강한 주가 된 데에는 수 많은 우여곡절과 숨은 영웅들의 희생이 있다. 

최초의 인디언과 프랑스, 스페인, 멕시코, 텍사스 공화국, 미국 남부연합을 거쳐 텍사스 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투쟁 속에 세워진 이 땅, over the six flag 텍사스를 알아보자..

1500년 초창기 황금에 대한 열망에 가득찬 스페인 탐험가들이 지금의 텍사스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 곳에 정착하였으며 1600년대에는 제법 그럴듯한 도시들이 만들어지고, 선교사들의 양성소와 요세가 설립되어 식민지화 되어갔다. 

그 무렵 유럽의 또 다른 열강인 프랑스 탐험가들도 금과 은을 찾기 위해 미시시피 강에서부터 내려와 요새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 곳의 주인인 인디언들과 전쟁과 수 많은 질병으로 인해 대부분 사망하고 요새는 파괴되었다.

그 시절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던 멕시코와 스페인정부의 갈등으로 텍사스의 황폐하고 거대한 땅을 발전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 때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미주리의 은행원 “ 모지스 오스틴”은 스폐인 정부에 텍사스를  미국의 식민지로 설립하기 위한 청원을 하였고, 스페인 정부는 이를 승인하였으나 오스틴은 식민지를 건설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스티븐 오스틴이 부친의 계획을 승계하여 1821년 지금도 Old Three-Hundred라고 불리는 첫 미국인 미국인 300세대를 이주시켰다.

멕시코는 1824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공화국이 되었는 데, 스티븐 오스틴 이후 수많은 미국인들이 멕시코 정부의 승인하에 텍사스로 이주를 해왔다.

1821년부터 1836년까지 정착자수가 30,000명까지 늘어났는 데, 이러한 급격한 미국인들의 유입은 멕시코 정부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1830년 멕시코 정부는 그들의 이민을 중지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멕시코와 텍사스 미국정착민들 사이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이 후 크고 작은 사건사고와 반란들이 일어났고, 결국 1835년 11월 3일 텍사스의 지도자들은 임시정부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텍사스 임시정부는 군대를 조직하여 멕시코  군이 지키고 있던 지금의 샌안토니오를 공격하여 장악한다.

샌안토니오를 뺏긴 멕시코는 크게 놀랐고, 대통령 산타아나를 포함한 1,800명~6,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샌안토니오로 파병한다. 

그 때 텍사스의 군대는 의용군으로 대부분 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못 한 지역주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병력도 186명에 불과하였다.

1836년 2월 23일 산타아나와 그의 군대는 샌안토니오에 도착하였다. 

산타아나 군단은 곡사포와 같은 대포로 샌안토니오를 수복하였으며, 텍사스 의용군은 요새 ‘알라모’에서 항복과 후퇴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기를 결정한다. 

텍사스 의용군은 대령 ‘윌리엄 B. 트래비스’의 지도 하에 끝까지 항전했다.

텍사스 의용군은 1836년 3월 6일부터 13일에 거쳐 멕시코 군에 대항하였고, 마지막에는 탄약이 떨어져 총을 막대기로 쓰면서까지 저항하였으나 186명 중 183명이 사망하였다.

살아남은 3명은 한 병사의 아내와 그녀의 15개월된 아기, 지휘관 윌리엄 트래비스의 노예 3명 뿐이었다.

이 전투는 나중에 미국에서 영웅적(?)인 이야기로 구전되어 수십편의 영화와 수많은 책으로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우리말 최후의 보루라는 의미로 ‘This is my Alamo’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알라모 요새 그 알라모 요새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텍사스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때 알라모에서 끝까지 맞서 싸운 윌리엄 트래비스가 텍사스 임시정부에 원군을 요청하는 편지 ‘Victory or Death’ 전문이 알라모 요새 앞 현판에 새겨져 있다.

한편, 텍사스 의용군은 전멸하였지만 그들의 용감한 전투와 텍사스 독립을 향한 의지는 수 많은 텍사스 주민들에게 큰 용기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알라모 전투 이후에 산타아나 장군은 계속 전진하였지만 텍사스 주민들은 ‘알라모를 기억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강력히 투쟁하였다.

멕시코군보다 훨씬 적은 숫자의 텍사스군과 지휘관 샘휴스턴 장군은 지금의 휴스턴 서쪽지역의 샌재신토 강에서 산타아나 군을 기습하기로 결정한다. 

산타아나 장군의 멕시코군이 샌재신토 강을 건너 경계를 풀고 휴식 중일 때 텍사스의용군의 기습이 시작되었고, 훨씬 적은 수의 텍사스군은 멕시코 군대를 물리치고 산타아나 장군까지 포로로 잡게 된다.

멕시코 공화국의 대통령인 산타아나의 생포로 그 해 5월 14일 벨라스코 조약을 맺어 산타아나의 생명을 보장하는 대신 텍사스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계약이 맺어지게 된다. 멕시코시티에서는 산타아나가 부재중인 틈을 타 이미 산타아나를 대통령에서 몰아내고  퇴임시켜 산타아나가 멕시코를 대표할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텍사스의 승리와 독립은 막을 수가 없었다. 

샘휴스턴 장군의 승리는 곧 그를 텍사스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게 한다. 텍사스의 첫 이주자 스티븐 오스틴과의 경합 끝에 승리한 그는 스티븐 오스틴을 국무장관으로 선출하여 공화국을 이끌었으나 전쟁휴유증과 심각한 문제들이 직면하였고 인디언들의 급습과 멕시코인들의 위협속에 시달려야 했다.

샘 휴스톤은 텍사스를 미 합중국으로 편입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노예제를 금지하는 미국 북부의 반대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1845년 12월 29일 미 합중국의 28번째 주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인의 정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멕시코인들과의 투쟁속에 멕시코/미국의 전쟁이 시작되고 2년 후, 1846년 멕시코가 항복하면서 과달루폐 이달고 조약으로 1500만달러에 텍사스외 남서부 대지(텍사스,콜로라도,애리조나,뉴 멕시코,와이오밍,캘리포니아,네바다,유타)에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미국에게 양도했다.

이후에도 텍사스는 1860년대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에 미국 연방정부 가입을 탈퇴하고 남부연합국에 가입하여 50,000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남부연합국을 위해 싸웠고,1870년이 되어서야 다시 미 연방정부에 재가입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많은 주민들의 희생과 개척정신으로 이루어진 텍사스는 지금은 The Lone Star, 하나의 별을 깃발에 휘날리며 세계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서있다.

텍사스 경제는 수많은 석유회사들과 농축산업이 이끌어왔고, 그리고 지금은 테슬라와 삼성전자를 비롯한 초일류 IT기업들까지 찾아오며 사람과 돈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텍사스,

그 텍사스를 제대로 알고, 느끼기 위해 텍사스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